드라마보다 더 지독한 빌런이 나타났다.

나는 드라마를 좋아한다.
조용한 걸 잘 못 견디는 편이라,
집안일을 할 때면 노동요처럼 드라마를 틀어둔다.
이어폰을 끼고,
화면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.
그저 흘러나오는 소리만 있으면 된다.
그래서 요즘 OTT 드라마가 뭐가 나오냐고 물어보면
정주행한 사람처럼 말하진 못하고,
숏츠 요약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수준이다.
드라마에는 늘 빌런이 등장한다.
의도가 불분명하거나,
자기 합리화에 능하거나,
혹은 그냥 지독하게 나쁜 사람.
그 빌런을 통해 주인공은 성장하고,
이야기는 굴러간다.
요즘 드라마 속 빌런들을 보면
대개 이기주의다.
사람들이 다정하지 않다.
자기만 옳고,
자기가 아는 세계 안에서만 살면서
타인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란다.
그리고 그 기대가 어긋나면
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고
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서슴없이 해버린다.
그런 빌런들이
꼭 드라마 속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.
현실에도 있다.
정말,
굳이 안 만나도 됐을
평범한 일상 속으로
빌런이 들어와 버렸다.
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린다.
복수해주고 싶다.
앙스레를 먹이고 싶다.
처음 빌런이 나타난 이후로
한동안은 이런 생각뿐이었다.
드라마에서는
시원한 사이다 한 방이면 끝이 난다.
빌런은 사라지고,
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.
하지만 현실은 다르다.
더러워서 참고 지나가야 한다.
또라이한테 물리면 답도 없다.
그런데 문제는
나 역시 그냥 지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다.
버틴다.
버티고, 또 버틴다.
남들이 뭐라 해도
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며
버티고 싶다.
그런데…
나이가 들어서인지
자꾸만 약해진다.
재판까지 가면 어떡하지?
변호사 비용은?
우리 아이들 신상도 다 아는데
혹시 해코지라도 하면?
나도 어쩔 수 없는
사십삼 세,
평범한 아줌마인가 보다.
바보처럼 쫄아서
그냥 넘어가야 하나 싶다가도,
자존심 상하고
책에서는 또
“용서가 진짜 복수다”
라는 말이 생각나서
스스로에게 묻는다.
용서해야 하나?
그런데…
용서가 안 되는데, 어쩌라고.
속으로 울컥,
화가 섞인 눈물이 차오르는 건
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.
이럴 땐
모범택시에 나오는 무지개 운수에
연락해보고도 싶고,
프로보노 팀에
“제 변호 좀 해주세요”
하고 묻고도 싶다.
하지만 현실은
드라마가 아니다.
아니,
드라마보다 더 독하다.
드라마에는
그래도 사이다 복수라도 있다.
현실에는
기대조차 할 수 없다.
그래서 우리가
드라마에 목매는 건
어쩌면 어쩔 수 없는
대리만족일지도 모른다.
그 여자에게도
나는 빌런이겠지.
그래도 좋다.
차라리 빌런이 되어라.
나는
그동안 나를 괴롭혔던
그 빌런과
이제 빠이빠이 할 거다.
앞으로 또 다른 빌런이 나타나면
어떡하지?
그땐
내 멘탈,
꽉 붙잡자.
진짜로.
-2026.01.31